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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저는 오랫동안 기록을 부지런한 사람들의 취미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여행을 다녀오면 사진을 찍었고, 좋은 영화를 보면 재미있었다고 말했으며, 인상적인 책을 읽으면 책장에 잘 꽂아두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진첩을 넘기다가 조금 당황했습니다.
분명 제가 찍은 사진이고, 제 옆에는 아내와 두 딸이 웃고 있는데 그날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먹었는지는커녕, 왜 그렇게 크게 웃고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휴대전화에는 그날의 풍경이 남아 있었지만, 정작 그 풍경 속에 있던 제 마음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기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기억은 보관하는 것보다 사라지는 데 더 능숙하고, 사진은 장면을 붙잡아도 마음까지 붙잡아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블로그를 시작합니다.
기록한 사람과 기록되지 않은 사람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입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고 영남을 대표하는 두 거대한 학문적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흔히 라이벌처럼 비교되지만, 두 사람이 학문을 대하는 태도와 후대에 기억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황은 많은 제자와 편지를 주고받았고, 자신의 생각을 여러 저술로 정리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다시 공부하고 해석해 다음 세대로 전달했습니다. 덕분에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황이 무엇을 고민했고, 어떤 질문에 어떻게 답했는지 비교적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조식도 수백 명의 제자를 길렀고 《학기유편》을 비롯한 글을 남겼습니다. 다만 이황에 비하면 저술과 학문 체계가 후대에 전해진 양상은 상대적으로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조식은 책상 위의 이론보다 실천과 기개를 중시했던 인물로 더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누가 더 뛰어났는지를 따지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게 흥미로운 것은, 한 사람이 살아낸 삶과 그 사람이 기록해 둔 삶 사이에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치열하게 고민하고 많은 것을 경험했더라도 말과 글로 남기지 않으면 후대의 사람들은 그 일부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 최고의 학자도 기록의 양과 전승 방식에 따라 다르게 기억됩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직장인이자 두 아이의 아빠인 저는 어떨까요.
제가 기록하지 않은 여행과 생각은 아마 역사적 수수께끼가 되기도 전에, 조용히 증발해 버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약: 경험은 그 자체로 소중하지만, 글로 정리된 경험만이 시간을 건너 다른 사람에게 온전하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사진만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
두 딸을 키우며 가족과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바다에도 갔고, 산에도 갔고, 낯선 도시의 골목도 걸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여행 한 번을 준비하는 일도 작은 작전 같았습니다. 챙겨야 할 짐은 왜 그렇게 많았는지,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 있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힘들었던 일은 먼저 흐려지고, 엉뚱한 장면들이 마음에 남습니다.
아이가 처음 본 바다 앞에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모습, 여행지에서 먹은 평범한 국수를 유난히 맛있어하던 표정, 길을 잘못 들었는데도 아무것도 모른 채 신나게 따라오던 작은 발걸음 같은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 장면들마저 점점 희미해진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기억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져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평생 잊지 않을 것 같았던 순간도 어느새 사진 속 날짜를 확인해야 겨우 떠오릅니다.
사진은 분명 훌륭한 기록입니다. 하지만 사진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사진에는 아이의 표정이 남지만 그때 아이가 한 말은 남지 않습니다. 식당의 음식은 찍혀 있지만 그 맛을 두고 가족이 나눈 농담은 보이지 않습니다. 멋진 풍경은 남아 있어도, 그 앞에서 제가 느꼈던 고마움이나 서운함, 피곤함과 행복함은 사진 바깥으로 빠져나갑니다.
그래서 이제는 여행지를 소개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습니다.
어디를 다녀왔는지뿐 아니라, 그곳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적어두려고 합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재미있어했고, 저는 무엇을 새롭게 발견했으며, 우리 가족이 그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남기고 싶습니다.
언젠가 두 딸이 성인이 된 뒤 이 글을 읽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 딸들이 “우리가 이런 곳에도 갔었어?”라고 묻다가, 글 속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과 지금보다 젊었던 부모를 만나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완벽하게 정확한 기억은 아니더라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을까요.
요약: 사진이 여행의 장면을 남긴다면, 글은 그 장면 속에서 가족이 나눈 말과 감정을 함께 남깁니다.
20년 직장 생활에서 건져 올릴 이야기
직장 생활도 어느덧 20년을 넘겼습니다.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때는 선배들이 모든 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제가 후배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해야 하는 자리에 서보니, 선배들도 답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먼저 실수했고, 먼저 고민했고, 그중 일부를 자기 방식으로 정리해 두었을 뿐이었습니다.
저 역시 직장에서 크고 작은 일을 겪었습니다. 일이 잘 풀렸던 순간도 있고, 다시 생각해도 얼굴이 뜨거워지는 실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 일을 어렵게 만든 적도 있고, 뜻밖의 도움을 받아 고비를 넘긴 적도 있습니다.
그 경험들이 저에게만 머물다 사라지는 것은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20년 직장 생활의 비법’ 같은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대단한 비법이 있었다면 저부터 진작 편안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돌아간다면 다르게 했을 일, 누군가 미리 알려줬다면 덜 헤맸을 일, 후배에게 한 번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잘 정리해 남긴다면 누군가에게 작은 참고표지판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험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좋은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다르고, 오래 일한 것과 그 경험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도 다른 문제입니다.
결국 잘 전달하려면 생각을 정리해야 합니다. 생각을 정리하려면 글을 써야 하고, 글로 정리된 생각은 말로도 조금 더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는 제 경험을 나누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제가 글과 말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연습장이 될 것입니다.
요약: 오래 쌓은 경험도 정리하지 않으면 개인의 기억으로 끝나지만, 글로 남기면 후배가 활용할 수 있는 작은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 담고 싶은 것
이곳에는 주로 영화와 여행, 책에 관한 이야기를 적으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작품의 완성도만 평가하기보다, 그 영화가 제 기억과 어떤 지점에서 만났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는 줄거리만 요약하기보다, 어떤 문장이 제 생각을 멈춰 세웠는지 남기고 싶습니다. 여행에 대해서는 유명한 장소와 맛집 정보뿐 아니라,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의 온도까지 기록하고 싶습니다.
가끔은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며 배운 것들도 꺼내놓을 생각입니다. 성공담보다는 시행착오가 많을 것이고, 정답보다는 ‘나는 이랬다’에 가까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이 블로그의 글들이 언제나 완벽하거나 대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 영화에서 오래 남은 장면 하나, 여행지에서 아이가 건넨 엉뚱한 말 한마디, 책을 읽다가 밑줄을 그은 문장 하나도 충분히 기록할 가치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사소해 보이는 일이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가장 그리운 기억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기록은 특별한 삶을 사는 사람이 남기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삶에서 특별한 순간을 발견하는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약: 영화·여행·책과 직장 생활의 경험을 통해, 정보뿐 아니라 그 순간에 느낀 생각과 감정까지 함께 기록하려 합니다.
결론
생각해보면 우리는 매일 조금씩 잊으며 살아갑니다.
어제 먹은 점심 메뉴도 쉽게 잊는데, 십 년 전 여행에서 느꼈던 마음이 저절로 온전히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조금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기억력만 믿고 살기에는 기억이 생각보다 자유분방합니다. 꼭 붙잡고 싶은 것은 놓치고,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될 창피한 장면은 새벽마다 선명하게 재생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기억과 힘겨루기를 하는 대신 글의 도움을 받아보려고 합니다.
이 블로그에 남기는 글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 것입니다. 거창한 학문을 세우거나 역사책에 이름을 남길 가능성도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함께 보낸 하루를 다시 불러오고, 한 권의 책과 한 편의 영화가 제게 남긴 생각을 붙잡고, 제가 먼저 겪은 시행착오를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면 기록을 시작할 이유로 충분합니다.
언젠가 두 딸이 이 글들을 읽으며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나고, 후배 한 사람이 제 경험에서 작은 힌트를 얻고, 미래의 제가 오래 전의 마음을 다시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억은 언젠가 흐려지지만, 기록은 그 흐릿해진 기억 곁에 오래 남아 있으니까요.
이제 영화와 여행, 책 그리고 살아가며 만난 이야기들을 하나씩 적어보려 합니다.
잘 쓰기 위해서라기보다, 잘 잊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