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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영화 《곡성》(2016) 공식 포스터, 제작: 사이드미러·폭스 인터내셔널 프로덕션 코리아, 배급: 이십세기폭스코리아.
포스터는 영화 소개 및 리뷰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일주일 넘게 밤마다 불을 켜고 잔 적이 있습니다. 2016년에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 바로 그 영화였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뭘 봤는지조차 정리가 안 됐습니다. 귀신이 몇 명인지도 몰랐고, 누가 악당인지도 끝내 파악하지 못한 채 극장 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영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첫 관람 실패기 — 안개 속을 걸었던 두 시간
저는 명작이라 싶은 영화는 최소 서너 번은 다시 보는 편입니다. 그런데 <곡성>만큼은 아직도 재관람을 못 했습니다. 개봉한 지 벌써 1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말입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무섭기 때문입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겁이 많은 편인데, 이 영화는 공포 영화 특유의 점프 스케어보다 훨씬 끈질긴 공포를 남겼습니다. 야생의 동물을 생식하는 장면, 무속(巫俗) 의식의 황홀경, 아이가 빙의 상태로 내뱉는 대사들이 며칠씩 잔상으로 남았습니다.
첫 관람 당시 제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귀신이 누구인가"에만 집중했다는 겁니다. 외지인이 악마인지 아닌지를 추적하면서 영화를 보다 보니, 정작 감독이 심어놓은 복선(伏線) — 이후 사건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암시하는 서사적 장치 — 들을 죄다 놓쳤습니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복선은 관객을 정답으로 안내하는 친절한 이정표인데, 나홍진 감독은 그걸 정반대로 비틀었습니다. 긍정적 이미지의 사물이 부정적 메시지로 기능하고, 선해 보이는 인물이 실은 미끼 역할을 합니다. 관객은 감독이 설계한 함정 위를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죠.
나중에 시나리오와 감독 인터뷰를 찾아 읽고서야 비로소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배경지식 없이 이 영화를 한 번만 보는 건 미완성 독서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이 재관람을 앞두거나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최소한의 지도 역할을 해줬으면 합니다.
상징 분석 — 금어초, 무명, 그리고 뒤집힌 믿음

영화 속 등장하는 금어초
자료를 찾아보면서 제가 가장 전율했던 건 '금어초(金魚草)'였습니다. 활짝 피었을 때는 화환에 쓸 만큼 화사하지만, 시들고 나면 사람의 해골 모양으로 변하는 꽃입니다. 영화 초반 주인공 종구가 그 꽃을 멍하니 바라보는 장면이 있는데, 처음 볼 때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이 꽃이 종구의 운명을 통째로 함축하는 핵심 상징물이었습니다. 제작진이 50평 농장을 빌려 직접 재배했고, 100송이 중 단 몇 송이만 해골 모양으로 시드는 특성상 완벽한 형태를 얻기 위해 몇 배의 수고를 들였다고 합니다. 이 공을 알고 나면 그 꽃 한 송이가 달라 보입니다.
세 인물의 상징성도 다시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외지인은 손바닥에 못 자국이 있고 오프닝에 성경 구절이 깔리는 등 기독교적 이미지를 입고 있습니다. 반면 무명(無明)은 산스크리트어 '아비디야(Avidyā)'에서 온 이름입니다. 아비디야란 불교 철학에서 '무지(無知)', 즉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되는 어둠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무명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 존재는 어떤 특정 신이 아니라 번뇌 그 자체"라는 선언인 셈입니다.
그런데 제가 자료를 읽으면서 가장 의아했던 건 무명의 행동 방식이었습니다. 그녀는 종구가 외지인을 의심하도록 불씨를 지펴놓고는, 나중엔 의심했다며 종구를 나무랍니다. 외지인을 압박해 죽음으로 몰아놓고는 그 책임을 종구에게 뒤집어씌우기도 합니다. 수호신처럼 보이지만 도덕적으로는 가장 불투명한 캐릭터입니다. 일광(一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얀 염소, 하얀 닭으로 외지인의 검은 이미지와 대비되도록 연출되었지만, 훈도시와 살풀이 구조물은 외지인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감독은 색깔 대비라는 시각적 미끼로 관객을 일광의 편에 서게 만든 겁니다. 저도 철저히 속았습니다.
이 영화가 섞어놓은 종교적 레이어는 기독교, 무속 신앙, 불교 철학, 밀교(密敎)까지 뻗어 있습니다. 밀교란 비밀스러운 의식과 주술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체계로, 외지인의 의식 장면 일부가 이와 닿아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가치관의 혼재가 일으키는 혼란이 곧 영화의 체험이고, 제가 첫 관람에서 완전히 무너진 이유였습니다.
- 금어초 — 아름다움 뒤에 해골로 변하는 꽃. 종구의 몰락을 예고하는 시각적 복선
- 외지인 — 기독교적 이미지(못 자국, 성경 구절). '믿음'의 영역을 상징
- 무명 — 산스크리트어 아비디야(번뇌). 선악을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존재
- 일광 — 외지인과 동일한 훈도시·구조물 사용. 시각적 미끼로 관객을 기만하는 장치
믿음의 문제 — 왜 감독은 끝내 답을 주지 않는가
영화 속 대사 중 가장 오래 남은 건 이것이었습니다. "직접 보셨소? 직접 보지도 않고 어떻게 확신을 하십니까?" 이 대사가 아이러니한 이유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확신에 차 설파하던 사제의 입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신앙(信仰) — 증거 없이 믿는 행위 — 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 눈앞의 현실을 직접 보지 않고 믿는 행위를 비판하는 장면입니다. 이보다 날카로운 반문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나홍진 감독의 최신작 <호프>(Hope)는 이 영화와 정반대의 정서를 담고 있다는 평이 있습니다. <곡성>이 "왜"라는 질문에 끝내 침묵하는 영화라면, <호프>는 그 침묵 이후를 다루는 방향으로 읽힙니다. 제가 두 영화를 비교해본 느낌상, <곡성>은 감독이 답을 찾지 못한 채로 질문을 관객에게 떠넘긴 작품처럼 보입니다. 그게 무책임함이 아니라 오히려 솔직함으로 느껴졌습니다.
종구의 비극에 '이유'가 없다는 설정이 처음엔 불친절하게 느껴졌는데, 배경지식을 가지고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였습니다. 우리의 실제 삶에도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지 설명되지 않는 불행이 있습니다. 영화 속 종구는 어떤 선택을 해도 "왜"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고, 그것이 해피엔딩과 배드엔딩을 가르는 기준조차 흐릿하게 만들었습니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듯, 이 영화는 막막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이 결국 확신 없는 찍기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려 했습니다(출처: 곡성 분석 영상 1).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현대인에게 너무 많은 절망감을 주는 건 아닌가 하는 슬픈 생각도 들었습니다. 특히 어린 효진이 빙의 상태로 연기하는 장면은 이야기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어린아이까지 이 비극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걸렸습니다. 영화적 완성도와 감정적 무게가 충돌하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은 이유는, 이 영화만큼 관객을 능동적으로 사고하게 만드는 한국 영화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출처: 곡성 분석 영상 2에서 정리한 일광의 정체 분석도 이 관점을 뒷받침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곡성에서 외지인은 결국 악마인가요, 신인가요?
A. 영화는 이 질문에 끝내 명확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외지인은 손바닥의 못 자국과 오프닝 성경 구절 등 기독교적 상징을 입고 있지만, 동시에 악마처럼 묘사되기도 합니다. 제가 자료를 찾아본 결론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두 해석 모두 가능하도록 설계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관객이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외지인의 정체가 달라지는 구조입니다.
Q. 무명은 선한 존재인가요? 왜 종구를 제대로 돕지 않나요?
A. 무명은 이름 자체가 산스크리트어로 '번뇌'를 뜻합니다. 선악으로 구분되는 신이 아니라 번뇌 그 자체를 형상화한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종구를 돕는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상황을 악화시키는 역할을 동시에 합니다. 인간이 필요한 순간 원하는 방식으로 등장하지 않는 신의 모습에 대한 감독의 물음이 담겨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Q. 금어초가 곡성에서 왜 그렇게 중요한 상징인가요?
A. 금어초는 활짝 피면 아름답지만 시들면 해골 모양으로 변하는 꽃입니다. 이 꽃의 성질이 종구의 운명 — 평범한 경찰이었다가 괴물을 잡으려다 스스로 괴물이 되는 과정 — 과 정확히 겹칩니다. 제작진이 50평 농장에서 직접 재배했을 정도로 공을 들인 장치인 만큼, 영화 초반 종구가 이 꽃을 바라보는 장면은 절대 그냥 지나치면 안 됩니다.
Q. 일광이 악인이라는 단서가 영화 안에 있나요?
A. 여러 군데 있습니다. 외지인과 동일한 훈도시를 착용한 장면, 살인 현장에서 이미 나왔던 둥지 모양 구조물을 살풀이에 똑같이 사용하는 장면, 뱀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도로에서 등장하는 첫 신이 대표적입니다. 다만 감독이 흑백 동물 이미지 대비로 관객을 일광의 편에 서게 만든 탓에, 저도 처음 볼 때는 이 단서들을 모두 흘려보냈습니다.
결론
<곡성>은 관객이 많은 공부를 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그 자체로 불친절한 영화입니다. 처음 봤을 때 안개 속을 헤맸던 저는 시나리오와 감독 인터뷰, 각종 분석 자료를 모두 찾아본 뒤에야 비로소 영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배경지식을 갖추고 나서 장면들을 다시 떠올렸을 때, 전율이 왔습니다. 처음의 모호함이 실패가 아니라 감독이 의도한 경험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권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관람으로 끝나지 않고 오래 질문을 남기는 영화를 찾는 사람이라면 다시 안개 속으로 들어갈 이유는 충분합니다.
이 영화를 아직 안 보셨다면 한 번쯤 오컬트 장르와 한국 무속 신앙, 복선 구조 정도만 가볍게 읽고 보시길 권합니다. 이미 보셨다면 금어초, 무명의 이름, 일광의 훈도시 세 가지만 머릿속에 넣고 다시 처음부터 틀어보시길 바랍니다.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영화로 보일 겁니다.
저에게 이 영화는 이해해서 편안해지는 명작이 아니라, 이해하려 할수록 내가 무엇을 믿는 사람인지 되묻게 하는 색다른 작품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영화를 다시 봐야한다면, 다시 볼 결심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