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앙드레김, 남진, 이만기, 김동건. 《국제시장》에 실명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기업인 하나, 패션 디자이너 하나, 가수 하나, 씨름 선수 하나, 방송 진행자 하나. 이 다섯을 나란히 적어 놓고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덕수의 인생을 통째로 뒤집어 놓은 사건들은 전부 국가가 내린 결정의 결과인데, 정작 그 결정을 내린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화면에 없거든요. 유명해진 개인은 나오고, 결정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글이 붙들 질문은 "이 영화가 아버지 세대를 잘 그렸는가"가 아닙니다. 개인이 한 번도 참여하지 못한 결정의 결과를, 영화가 개인의 선택으로 번역할 때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는가. 파독도 파병도 기록상으로는 국가와 국가가 맺은 계약의 산물인데, 영화는 그 계..
"우리 아버지들은 이런 방식으로 살았다. 나는 관객들이 아버지의 위치에서 이 사람을 보기를 바란다." 개봉 직후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윤종빈 감독이 남긴 말입니다. 조직폭력을 다룬 영화의 감독이 주인공을 두고 '악당'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단어를 꺼낸다는 것. 저는 이 한 문장이 이 작품의 성격을 거의 다 설명한다고 봅니다. 실제로 같은 인터뷰에서 감독은 최익현을 두고 "전형적인 비리형 공무원이자 책임감 있는 가장"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나쁜 놈을 그리려던 영화가 아니라, 그 시절 평범하게 살아남으려던 사람을 그리려던 영화였다는 뜻입니다.그래서 이 글이 붙들 질문은 "조직폭력은 어떻게 소탕됐는가"가 아닙니다. 폭력조직과 공권력이 적이 아니라 동업자였던 시기에, 그 둘을 ..
1987년 1월 15일,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하루 전 숨진 서울대생의 사인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냉수를 몇 컵 마신 뒤 조사관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것, 그러니까 단순 쇼크사라는 취지였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처음 활자로 읽었을 때 화보다 어이없음이 먼저 왔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 죽음을 설명하는 말이 저렇게 가벼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저 말을 국가가 공식 발표로 내놨다는 것. 서른 해가 넘게 지난 지금도 저 한 문장이 그대로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보면, 거짓말은 정교할 때보다 허술할 때 더 오래 남는 모양입니다. 실제로 그 발표는 나흘 만에 무너집니다. 1월 19일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공식 인정했고, 그해 6월 거리는 이 사건의 이름을 부르며 가득 찼습니다. 장준환 감독..
먼저 솔직하게 밝히고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광주에 얽힌 개인적인 기억이 없습니다. 그곳에 살아 본 적도, 1980년 5월을 겪은 사람을 가까이서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는 "저는 그때 어디서 무엇을 느꼈다" 같은 문장이 없을 겁니다. 없는 기억을 있는 척 쓰는 것이 이 사건 앞에서 가장 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대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이 영화가 무엇을 보여 주고 무엇을 비추지 않았는지, 그리고 실제 기록과 어디서 갈라지는지를 확인 가능한 자료로 하나씩 맞춰 보는 것입니다. 스포일러 안내: 앞의 세 섹션은 이미 공개된 역사 기록의 범위에서만 씁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인물들의 마무리는 네 번째 섹션 끝의 결말 요약 상자에만 모아 두었으니, 아직 안 보신 분은 ..
2024년 12월 3일 밤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계엄 선포 소식에 확인한 비트코인 시세는 불과 십수 분 사이 30% 넘게 곤두박질치고 있었고,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한 건 다음 날 새벽 1시였습니다. 그 몇 시간을 뜬눈으로 생방송만 지켜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 장면이 유독 낯익었던 이유는, 그것이 반복된 역사였기 때문입니다.스포일러 안내: 본문 세 개의 분석 섹션은 이미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 범위에서만 씁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인물들의 최후는 아래 결말 요약 상자에만 따로 모아 두었으니, 아직 안 보신 분은 그 상자만 건너뛰시면 됩니다. 직접 제작한 타임라인 도식입니다. 시각 표기는 위키백과 12·12 군사반란 문서와 국사편찬위원회 서술을 대조해 정리했..
《메이드 인 코리아 시즌2》를 스포일러 없이 리뷰합니다. 결말과 후반부 반전은 제외하고 초중반의 시대 배경, 인물 구도와 연출 특징을 살펴봅니다. 아직 작품을 보지 않은 분도 안심하고 읽을 수 있습니다. 먼저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 시리즈를 보는 내내 인물의 이름을 자꾸 잊어버렸습니다. 백기태, 장건영, 황대식, 천석중. 낯설어서가 아니라, 이 작품이 이름을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그가 중앙정보부 쪽 사람이냐 보안사 쪽 사람이냐, 지금 앉은 의자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리뷰에서 던지고 싶은 질문은 하나입니다. 이 시리즈가 그리는 것은 1979년이라는 사건인가, 아니면 그 사건이 비워 놓은 자리인가. 이미지 출처: 머니투데이 기사 게재본, 원..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실컷 감동해 놓고, 극장을 나서면서 뒤늦게 좀 민망해졌습니다. 제가 박수를 보낸 그 왕은 광해군이 아니라 하선이었으니까요. 대동법을 밀어붙이고 명나라 사신 앞에서 백성을 먼저 말하는 장면마다 마음이 움직였는데, 그 결정을 화면에서 내리는 사람은 만두 장수를 하던 광대였습니다. 이 글은 감동과 역사적 사실 사이의 차이를 다시 보며 정리한 기록입니다. 영화의 결말과 역사적 사실 비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공식 포스터, 제작: CJ E&M, 배급: CJ E&M.포스터는 영화 소개 및 리뷰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기본 정보 — 개봉일부터 관객수까지개봉일2012년 9월 13일감독추창..
이 영화는 개봉하고 한참 뒤에야 접했습니다. 성남시에 살면서도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깝다는 이유로 오히려 남한산성에 관심이 없었고 방문도 드물었습니다.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유적 답사 삼아 여러 곳을 다니게 됐고, 남한산성도 그 계기로 방문했습니다. 방문 전에 쉽게 쓰인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읽으며 지식을 정리했고, 그 과정에서 이 영화도 보게 됐습니다.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과 역사적 사실 비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영화 《남한산성》(2017) 공식 포스터, 제작: 싸이런픽쳐스·CJ E&M, 배급: CJ E&M.포스터는 영화 소개 및 리뷰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기본 정보 — 개봉일부터 관객수까지개봉일2017년 1..
시리즈의 마지막 영화이기에 개봉하자 마자 극장으로 한 걸음에 달려가 관람하였습니다. (2022)과 (2014)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병력으로 역사적인 결과를 만들어낸 전투 자체가 중심이었다면, 은 관객이 이순신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그 관전자적 시점 때문에 영화는 승리의 쾌감보다 한 인물의 마지막 순간에 더 오래 머무릅니다. 이미지 출처: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2023) 공식 포스터, 제작: 빅스톤픽쳐스,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포스터는 영화 소개 및 리뷰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기본 정보 — 개봉일부터 흥행 성적까지개봉일2023년 12월 20일감독김한민주연김윤석(이순신), 백윤식(시마즈 요시히로), 정재영(..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일주일 넘게 밤마다 불을 켜고 잔 적이 있습니다. 2016년에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이 바로 그 영화였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뭘 봤는지조차 정리가 안 됐습니다. 귀신이 몇 명인지도 몰랐고, 누가 악당인지도 끝내 파악하지 못한 채 극장 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영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이미지 출처: 영화 《곡성》(2016) 공식 포스터, 제작: 사이드미러·폭스 인터내셔널 프로덕션 코리아, 배급: 이십세기폭스코리아.포스터는 영화 소개 및 리뷰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첫 관람 실패기 — 안갯속을 걸었던 두 시간저는 명작이라 싶은 영화는 최소 서너 번은 다시 보는 편입니다. 그런데 만큼은 아직도 재관람을 못 ..